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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3, 2020

즐거움을 알아야 폭력을 인식할 수 있다 - 고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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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움어린이책' 회수 사태에 부쳐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공동대표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공동대표

“지혜가 어떻게 생겼게? 지혜는 엄마아빠가 다리 밑에서 주워온 거야.”
어릴 적, 아빠가 나에게 장난삼아 종종 하던 말이다. 그 외에도 ‘황새가 아이를 물어다 준다’, ‘삼신할머니가 아이를 선물로 준다’ 등 다양한 속설이 오갔지만, 어린 나에게 아이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정확한 정보를 담아 알려주는 어른은 없었다. 어쩔 때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긴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과정인 섹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정부가 나다움어린이책으로 선정했던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섹스뿐만 아니라 임신, 출산까지의 과정을 그림책으로 알기 쉽고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국민의힘(미래통합당) 김병욱 국회의원은 나다움어린이책의 일부가 “남녀 간 성관계를 ‘재미있는 일’, ‘신나고 멋진 일’, ‘하고 싶어진다’는 말로 표현했고, 동성애를 미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나다움어린이책’에 반대하고 여가부 폐지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에는 1만 여명이 동참한 상황이다. 정부는 성평등과 아동인권의 가치를 지키지 못한 채, 문제가 된 7종의 도서를 회수하기로 결정했다.

정부가 선정 및 배포한 나다움어린이책 중 논란이 되었던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의 표지.
정부가 선정 및 배포한 나다움어린이책 중 논란이 되었던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의 표지.

성관계를 ‘재미있는 일’, ‘신나고 멋진 일’로 표현하는 것은 왜 부적절할까? 우리는 이미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라는 말로 상징되는, 금기만을 강조하는 성교육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성이 위험하고 알아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겨질 때, 어린이가 배우는 것은 자신의 성적 욕망과 실천을 숨겨야 한다는 규범이다. 나 역시 자위를 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성적 욕망을 느끼거나 이를 실천해보고 싶을 때에, 주변에 논의할 수 있는 창구가 없었다.

나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얻지 못해서, 인터넷에 떠도는 수위글, 야설 같은 것들로 섹스를 배웠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떨 때 즐거운지 상상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수히 펼쳐진 전형적인 섹스의 각본을 먼저 접한 것이다. 각본은 콘돔을 쓰지 않는다거나, ‘싫다’고 하는 여성에게 성기 삽입을 하는 남성상이 섹시한 것으로 여겨지는 등 폭력에 가까운 묘사로 이루어졌다. 나는 그 속에서 즐거움과 폭력을 구분하는 법, 나 자신의 욕망을 탐닉하는 법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성관계는 ‘재미있는 일’, ‘신나고 멋진 일’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성 청소년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여성들이 위험과 폭력의 각본을 넘어, 자신의 즐거움을 찾아갈 수 있는 힘이다.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면, 무엇이 폭력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섹스를 나의 즐거움이 아닌, 다른 이의 각본에 맞추어 수행하게 될 것이다. 해당 그림책에 남녀 간의 성기결합 섹스를 넘어, 성기결합이 없는 섹스, 퀴어 간 섹스 등 보다 다양한 섹스의 형태와 상상력이 더 실릴 수 있다면 좋았겠다. 나아가, 섹스가 일탈적이고 위험한 행위가 아닌, 테니스를 치고 차를 마시는 등 내 몸이 감각하고 움직이는 일의 연장선상에서 사고될 수 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수된 ‘나다움어린이책’은 시대에 맞지 않는 급진적인 책이 아니라, 이제야 발간된 것이 아쉬울 만큼 당연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정부가 최소한의 신념도 지키지 못한 채, ‘나다움어린이책’을 회수한 것에 유감을 표한다. 지금의 사태에 멈추지 않고, 더 구체적이고 다양한 상상력을 담은 성평등 그림책이 나올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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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04, 2020 at 07:2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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